책리뷰2.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2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요약
루소처럼 걷는법
루소 에 대해 가장먼저 저자는 ‘장자크 루소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 이었다.’고 말한다. 순간 이 문장에서 그렇다면 ‘나’ 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으로 사람들이 말하게 될까 가 궁금해졌다. 이 질문도 인스턴트 커피처럼 답을 뽑지말고 조금 더 사골처럼 고아내 보려 한다. 루소는 산책하는 사람 이었다고 한다. ‘그는 자주 걸었고, 혼자서 걸었다. 본질적으로 걷기는 개인적인 행위이다.’ 고 말한다. 사실 걷는다는것은 내가 내 두발로 걷는것이다. 열심히 걷든 어슬렁 걷든. 그 지극해 개인적인 일을 문장으로 마주하는게 조금은 낯설었다.
저자는 ‘자유는 걷기의 본질이다.’ 라고 말한다. 걷기에서 자유까지 나오다니 좀 신기한 느낌이었다.
루소는 “혼자서 두발로 여행할 때만큼…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존재하고, 이렇게 살아 있고, 이렇게 나 자신이었던 적이 없다.”고 했다. 사실 동네 산책 혹은 서울에서 만나는 데이트 가 아니라면 여행이라면 뚜벅이 여행보다, 차를 갖고 다니는 여행을 선호하게 된다. 걷는것은 힘드니까. 그런데 가끔은 혼자 의미없는 생각들을 되내이며 산책을 할때가 있다. 일을 하다 막힐때 잠시 사옥 옥상에 올라가 걷기도 하고 바람도 쐬고 점심시간을 노려 식당까지걷기도 하며 생각의 환기를 주곤 한다. 아마 나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 같다. 루소의 말처럼 혼자서 걸을 때 만큼 내가 존재하고 대지를 딛고 서있음을 느끼고 온전히 나에 대해서 생각할 때가 없는듯 하다.
저자는 걷기는 루소의 철학에 딱 맞았다고 한다. ‘루소는 자연으로의 회귀를 주장했는데, 걷기보다 더 자연스로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저자는 루소와 조금 다른듯 하다. (문득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이 책을 통해 루소를 만나기도 하지만, 저자가 루소와 만나 대화하는 모습을 엿보는것 같아 즐거웠다.). 저자는 대자연은 성가시다고 하였다. ‘대자연은 나의 핵심에 있는 무능함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고 표현하였다. 이 문장에 적잖게 공감한다. 최근 데이트로 서촌을 다녀왔다. 요즘 집에만 머물다가 정말 너무도 오랜만에 20000보를 넘게 걸은것이다. 해가 질때쯤 갑자기 한 쪽 눈에 먼지가 낀것 처럼 이물감이 느껴지며 너무 불편했다. 실제 이물질이 아닌 내 피로가 눈에 낀것이다. 걷다보면 느끼는 무능함이란 대표적으로 체력이 아닐까.
저자는 루소의 철학은 다음 네 어절로 요약할 수 있다고 한다. ‘자연은 좋고 사회는 나쁘다.’ 루소는 ‘인간의 자연적 선함’을 믿었다. 루소의 저서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루소는 자연 상태에 있는 인간이 노동도 언어도 없이, 거처도 바라는 것도 의사소통도 없이, 타인에 대한 욕구도 마찬가지로 타인을 해치고자 하는 욕망도 없이 숲속을 돌아다니는’ 모습을 묘사한다. 상상할 수 없다. 원시인인가. 그런데 반면, 그렇지 자연 상태(=원시인)이 아닐까. 루소는 비열하고 옹졸하고 앙심을 품고, 피해망상에 빠진 채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것은 사회다 라고 하는것이다. 루소는 우리가 인간 본성이라고 생각하는 것 중 많은 것이 사실은 사회적 관습이라고 믿는다. 루소의 야만인은 스스로를 향한 사랑을 자주 경험하는데, 루소는 이를 자기사랑 이라고 부른다. 이런 건강한 감정은 더 이기적인 종류의 사랑과는 다르며, 루소는 이런 이기적인 사랑을 자기편애라고 부른다. 전자는 인간 본성에서, 후자는 사회에서 비롯된다 한다. 저자는 이제 루소가 왜 걸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걷는 데에는 인류 문명의 인위적 요소가 전혀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또 ‘걷기는 자극과 휴식, 노력과 게으름 사이의 정확한 균형을 제공한다. 우리는 걸을 때 무언가를 하는 동시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 말에 공감했다. 나는 그래서 걷는 것이 좋으면서 싫다. 무언가 하지 않는다는 자기폄하적 생각속에 걸을 때 무언가를 한다는 자기자위를 할 수 있다. 저자가 읽은 루소의 미완성 유작인 [고독한 상책자의 몽상]이라는 책 속의 루소는 주로 의견에 반대하는 루소도, 속마음을 고백하는 루소도, 개혁을 주창하는 루소도 아니라 말한다. 여기서의 루소는 쉬고있는 루소라고. 위 책에서 루소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끊임없는 변화의 흐름 속에 있다’고 말했다. ‘만물은 변화한다.’ 라는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격언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 저자의 말이다. 나는 철학자가 아니라서..철학자를 알지못한다.) 저자는 우리가 두번째로 발을 담그는 강물은 절대로 전과 같은 강물이 아니며, 우리 자신도 전과 같은 우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1초전의 나와 1초후의 나는 다르다. 밥을 먹기전의 나와 먹고난후의 나는 다르다. 왜 우리 속담에 화장실 갈때와 나올때가 다르다 말하지 않는가. 이 작은 속담도 마음속으로 되새김질 해보면 조금은 많은 울림을 준다. 나는 이 책이 전하는 작은 울림에 마음이 진동한다. 저자는 루소가 머물렀던 더이상 섬이 아닌 섬에 들어서자 루소가 그곳을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알게되었다. ‘눈앞의 풍경은 완벽한 자연 그 자체, 시인 필립 라킨이 말한”진지한 대지”였다. ’ 고 전한다.
저자가 생피에르를 가로지르는 작은 길을 발견하고 그 길을 따라 걸으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내가 평생 해온 것 처럼, 하지만 보다 잘.” 저자는 ‘잘’을 ‘빠르게’로 해석하고 곧 터무니없이 빠른속도로 걸었다. 이내 곧 저자는 정신을 차리고 코끼리 처럼 느리게 속도를 낮춘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왜 중간은 안되는 거야’ 라고 말했다 한다. 종종 걸을 때 뿐 아니라 저자의 산책과 걸음을 내 삶의 템포로 비추어 보았다. 나는 종종 어떤 일이든 공부든 무언가 시작할 때에 처음엔 차분히 하나씩 해보자 라는 생각이지만, 이내 빨리좀 되라 해결이 왜 안되 왜이렇게 진전이 안되 하며 혼자 속을 끓이곤 한다. 그러나 책에서 저자는 마르쿠스의 대답을 전한다. “ 상상속에서든 현실에서든 역경을 만나면 자기연민이나, 절망에 빠지지 말고 그저 다시 시작하라. 이런식으로 바라보면, 삶은 더이상 실패한 서사나 망쳐버린 결말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건 진실이 아니다. 결말 같은건 없다. 무한한 시작의 사슬만이 있을 뿐” 무한한 시작의 사슬 처음 엠비티아이 테스트가 나오고 내 성향을 파악한 순간, 아 나만이 시작의 사슬을 벗지 못하는것이 아님을 느끼고 얼마나 반가웠던지. 그 이야기를 저자도 전한다.
저자는 우리가 잊기위해 걷는다고 말한다. 짜증내는 상사, 배우자와의 말다툼, 날아오는 고지서 등등. 잊기위해 걷는다. 그런데 사실 걷다보면 생각은 다시 파도를 타고 처음 고민은 잊고 어느새 새로운 고민의 시작의 파도를 타지않던가. 루소는 행복하게 죽었다한다. 삶의 말년이 다가올 수록 루소의 걸음은 더 부드럽고 낙천적인 성격을띠었다. 옛날과 같은 자기 연민과 피해망상의 흔적이 아직 조금 남아있었지만 절박함은 사라지고 없었다고 한다. 루소는 더 이상 도망치거나 무언가를 찾거나 철학적 주장을 하기 위해 걷지않고 그냥 걸었다고 한다. 사실 최근 백신 2차 접종을 마치면 산티아고를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35일의 800키로의 여정은 힘들지만 일주일의 여정은 다녀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고민에 걸음을 향한 욕심을 내었다. 아직은 하루종일 걷다 발견할 나의 핵심에 있는 무능함에 또다시 자기연민이 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생각속에 파도만 타고있다. 잔잔한 파도. 웅크려있는 내 절박함은 언제 사라지려는지 호르몬의 공격에 무너지고 마는 절박함의 방호벽. 루소의 말년 처럼 그때 되면 사라지려나.